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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클래식역사- 낭만파 시대 '클라라 슈만' 여성 피아니스트 사랑이야기

by 🥕👩🏻‍🎓 2020. 6. 2.

19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피아니스트.

역사에 남을 만큼 활약한 여성 피아니스트로서 클라라 슈만을 빼놓을순 없습니다. 이번에는 낭만파 시대의 천재 미인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클라라 슈만

독인의 피아니스트로 작곡가인 남편 R.A.슈만과 함께 러시아, 빈 등지로 연주여향을 하며 많은 가곡의 걸작품을 낳게하였습니다.. 작곡도 하였으며 슈만 및 브람스의 해석자로도 유명합니다.

클라라는 1819년 라이프치히 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피아노 교사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비크. 5세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였습니다.

 

  • 천재 소녀 클라라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의 영재교육을 받은 클라라는 9세에 프로에 데뷔합니다.
게반트하우스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솔리스트를 맡았는데 모차르트에서 데뷔하는 것도 아버지의 작전인가요.
역시 음악계에서 신동이라고 하면 모차르트이기 때문에 부러워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네요~

12세 때에는 유럽 각지에서 콘서트를 개최.어느 지역에서도 절찬받아 순조롭게 지명도를 올려 갑니다.
18세 때에는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왕실황실내악 주자'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 '왕실황실내악주자'라는 칭호는 당시 음악가들에게 최고봉의 영예.18세의 클라라는 천재 소녀라고 불리며 유럽 각지에서 리스트나 타르베르크와 함께 칭해지는 스타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슈만과의 만남, 결혼

슈만과 만났을 때 클라라는 11세. 슈만은 20살이 되어있을대 입니다.
이때는 아직 서로 연애감정은 없었던것 같습니다. 아직 어릴때여서 그랬나봅니다.
처음에는 남매와 같은 관계였던 것 같아요.

클라라가 슈만과 연애 관계가 된 것은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의 두 번째 부인이 출산하고, 클라라에게 이복 형제가 생겼을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복잡한 가정환경 속에서 마음의 근거가 된 슈만에 대해 연애 감정이 싹트고 있는 것입니다.
1833년에는 클라라가 로맨스 발리에 작품 3을 작곡해 슈만에게 바쳤고, 슈만은 클라라 비크의 주제에 의해 즉흥곡 작품 5를 돌려주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적어도 클라라 쪽에는 연애 감정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클라라 쪽에는 라고 한 것은 슈만은 1834~1835년에 '사육제'라는 피아노 소품집을 발표했고, 그 곡집은 당시 좋아했던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을 떠올리며 쓴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육제 곡 중에는 클라라를 소재로 한 것도 있지만, 적어도 1833년 시점에서 슈만에게 클라라는 아직 여동생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순탄치 않은 결혼 

클라라와 슈만이 사귀기 시작한 것은 1835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1837년에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결혼의 승낙을 얻고자 합니다.
당시 결혼하려면 부모의 허락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프리드리히 비크는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클라라를 스타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열심히 키웠기 때문에 유럽에서 클라라가 누구나 인정하는 스타피아니스트가 되어 앞날이 창창할것 같았는데, 그런 시기에 설마 자신의 제자와의 결혼을 할거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의 반대는 상당했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것은 3년 뒤인 1840년.
재판 사태까지 나서 겨우입니다.

 

슈만과의 결혼 생활 

 

클라라는 슈만과 무사히 결혼하고 보배도 잘 타고납니다.
현재의 이미지라면 거물급 음악가와 스타 피아니스트의 결혼이라 부유한 가정을 연상시키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슈만은 평판이 좋은 곡을 만들고 집필활동을 해서 유명한 음악가였지만 당시 지명도는 클라라가 훨씬 앞섰습니다.
워낙 왕실황실내악 주자라 연주회를 열면 큰 인기를 끌었지요.

클라라는 결혼해서도 연주여행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스타 피아니스트였지만 1840년대에는 출산(8명 낳음)과 육아 때문에 유럽 각지를 돌아다녀야 하는 연주여행도 힘들었던 것 같아요.

 

어디까지 충실한지는 확실치 않지만 클라라의 반생을 그린 클라라 슈만 사랑의 협주곡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신을 앓고 있는 아픈 슈만과 그것을 지탱하는 다부진 클라라. 거기에 젊은 브람스를 섞은 인간 문양이 주된 스토리이지만, 슈만가의 결코 부유하지 않은 삶의 모습도 담고 있습니다.

 

슈만과의 사별 이후..

슈만과의 사별 이후
클라라는 슈만의 말년의 정신병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또 슈만의 곡을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기 위해 분주합니다.
1877년에는 슈만의 모든 작품집을 편찬하기도 합니다.

76세 뇌 출혈로 숨질 때까지 남편, 로베르토 슈만의 때문에 활동하고 왔습니다.

현재도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의 100마르크 지폐에 초상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브람스와의 삼각관계?

클라라 하면 잠깐 언급했지만 남편, 슈만과 그의 제자, 브람스와의 삼각 관계도 유명합니다.
브람스가 슈만 가문을 찾은 게 20세 때. 슈만이 43살, 클라라는 34살 무렵이군요~
이미 이때는 슈만이 정신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클라라는 여러모로 마음고생이 끊이지 않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브람스가 슈만 가문을 방문한 것이 1853년, 슈만이 라인 강에 투신해 자살 미수를 한 것이 1854년, 그리고 2년 후에는 사망했습니다.

 

슈만은 클라라가 낳은 마지막 아이를 '브람스의 자식?' 이라고 의심하고 있었고, 슈만이 죽고 나서도 클라라와 브람스는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에서 둘의 관계가 의심되는 요인이 되고 있는데요. 사실은 클라라와 브람스의 관계에 대해 확고한 증거는 없기 때문에 소문 수준의 일인지도 모릅니다.

 

작곡의 대한 열정

앞서 소개한 클라라 슈만 사랑의 협주곡 영화에서도 새 집으로 이사 와서 기뻐하는 장면에서 나도 작곡을 할 수 있어라는 식의 대사를 하자마자 슈만이 분명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인 장면이 있습니다.

클라라는 젊은 시절부터 작곡에 의욕적이었지만, 당시는 여성이 작곡자가 되는 것은 그다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클라라는 작곡에 매우 능숙하고, 클라라의 작품을 들은 음악가들은 극찬하고 있습니다.

클라라가 작곡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다면 남편 슈만보다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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